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시대를 풍미하던 슈퍼스타 최동원의 모습을 되돌보고 그의 전성기와 대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렸다.
20일 방송된 sbs 예능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장성규, 장도현, 장현성이 이야깃꾼이 배드민턴 선수 이용대, 배우 신소율, 개그맨 김진수 리스너에게 야구 선수 최동원의 그날 이야기를 들려줬답니다.
한국 프로야구 40주년을 맞은 2022년 가을, 야구가 인생 그 자체였던 불멸의 투수 최동원은 고교야구가 열풍이던 1975년 9월의 동대문 운동장, 2만 6천여 명의 관중이 한 선수를 바라보고 었다. 전날 믿기 힘든 경기력을 선보이고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다시 마운드에 오른 경남고의 투수였다.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이틀째 선발 등판을 했고 17이닝 연속 노히트 노런이라는 한국 야구 역사상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무려 3일 연속 선발 등판을 했다. 최동원은 무쇠팔, 강철 어깨, 삼진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게 됐습니다.
최동원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최초로 신체 보험을 가입했는데 어깨보험을 들어주게 됐다. 최동원은 아버지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가 한국 전쟁때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으로 생활하셨다고 전했다. 최동원은 슈퍼 월드컵 세계 야구대회를 제패했는데 150~152km/h 강속구와 함께 마구를 구사했다.
무쇠팔 최동원의 폭포수 커브는 상대 팀 강타자들은 물론,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찬사를 얻고 한국 프로야구 황금기를 이끌었다. 최동원은 메이저리그에서 스카우트가 됐는데 바로 류현진 선수의 소속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하지만 1982년 프로야구가 첫 개막식을 하고 메이저리그를 가지 못하고 프로야구단에 들어가게 됐답니다.
당시 전두환은 군부 장악으로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하고 국민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3S(Screen, Sex, Sports)를 하게 됐다. 그렇게 프로야구단 6개를 만들고 스타 플레이어가 필요했고 슈퍼스타 최동원이 필요했다.
1984년 최동원 선수가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고 싶다고 했던 바로 그 해에는 우승 후보 삼성과 최동원은 1차전 완봉승, 이틀 후 3차전에서 완투승, 5, 6차전까지 나선 그는 단 1승이 목표였습니다.
최동원 선수는 감독의 말을 듣고 연속으로 등판하겠다고 했고 롯데를 유려한 우승 후보 삼성을 코 앞까지 추격하면서 “1, 3, 5, 7 차전은 해야 된다”라고 말했다. 최동원은 1차전에서는 4대 0으로 승리를 했고 최동원이 없는 2차전은 패하고 최동원이 등판한 3차전은 승리를 했다.
다음 날, 4차전에서는 7대 0으로 삼성이 승리하고 5차전에서는 최동원의 등판했지만 패배를 했고 6차전에서는 최동원이 없는 경기로 선발 투수로 임호균 선수가 올랐고 제구력이 너무 좋아서 3대 1로 승리를 한 가운데 임호균 선수의 손가락이 살점이 파이는 부상을 입었다. 이에 투수교체를 하게 됐고 최동원이 등판을 하게 됐고 6대 1로 승리하게 됐고 7차전은 비가와서 경기가 미뤄지게 됐답니다.
운명의 7차전, 최동원은 연속 경기 때문에 힘들어했고 감독의 교체 제안에도 좀처럼 마운드를 내려오지 않았다. 최동원의 표정도 일그러지고 패배가 점점 앞으로 다가오던 그 때 그라운드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최동원은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해 혼신을 다해 승부수를 던졌고 7회말 부터 그의 볼에 스피드가 붙기 시작했다. 8회 초에는 타자로 유두열 선수가 섰고 3점 홈런을 날렸고 롯데 자이언츠가 6대 4로 삼성에게서 승리를 했습니다.
1988년 9월, 88 서울 올림픽이 나흘 앞으로 다가 온 그날, 최동원이 여기 저기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최동원은 서둘러서 대전의 한 호텔로 향했고 잠시후 버스들이 도착하고 140명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내리고 있었다.
한국프로야구 선수회 창립총회가 열리고 선수 복지 향상을 위해 회장은 최동원이 됐다. 당시 비주전과 2군 선수들은 낮은 연봉과 부족한 장비 때문에 보호받지 못했고 부상만 입어도 방출이 됐다고 했답니다.
최동원은 선수회에서 연봉하한선과 연금제도를 만들면서 한국 프로야구를 위해 애셨다. 선수회가 결정된 직후 구단에서는 재계약하지 않는다는 강수를 뒀다. 그래서 이후 선수회에는 선수들이 오지 않고 선수회는 해체되고 말았다. 최동원은 이후 구단에서 트레이드라는 핑계로 방출이 됐고 다른 선수들은 보복성 트레이드라고 말했다.
최동원은 결국 고향팀 롯데를 떠나고 삼성으로 가서 마운드의 서게 됐지만 더 이상 강철 어깨는 아니었고 1990년 가을, 나이 32세에 은퇴식도 없이 은퇴를 하게 됐다. 15년 후, 최동원은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투수가 되어 나타났는데 레전드 선수 답게 특급 에이스를 키웠는데 바로 괴물투수 류현진이었답니다.
최동원은 대장암으로 수술까지 받고 항암치료 중이었는데 3년 만에 수척한 모습으로 유니폼을 입고 다시 경기장에 나타났고 기력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2011년 53살의 나이에 사망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안타까움을 줬다.
최동원 동상, 부산 사직야구장에 세운다 - 2013. 3. 29
불세출의 투수' 고 최동원 씨(1958∼2011·사진)를 기리는 동상이 올해 가을 부산 사직야구장에 세워진다. 사단법인 고 최동원 기념사업회(이사장 권기우 변호사)는 "9월 14일을 전후해 사직야구장 정문 앞 광장에 최동원 선수의 동상을 건립한다"고 28일 밝혔답니다.
9월 14일은 최 씨가 "고향 부산에 돌아가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53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지 2주기가 되는 날. 고인은 부산 경남고와 연세대 시절에 최고의 오른손 정통파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그를 추모하기 위해 2011년 10월 11일 최동원 기념 야구박물관 건립 범시민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지난해 8월 1일에는 자본금 5000만 원으로 사단법인 고 최동원 기념사업회가 설립돼 기부금 모금 운동을 벌여왔다. 부산 상공인과 경남고 동문, 프로선수협의회 등이 모금에 동참했다. 부산은행은 27일 최동원 동상 건립을 위해 5000만 원을 보탰습니다.
기념사업회는 그동안 모금한 돈 1억 원으로 최동원 동상을 공모하기로 했다. 또 최동원 투수상을 만들기로 하고 8억 원을 모을 계획이다. 기념사업회 이사로 참여한 양상문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최동원 투수상 제정과 관련한 실무를 맡았다. 야구박물관 건립 및 야구 명예의 전당 부산 유치도 추진 중이다.
최동원 11주기..'무쇠 팔' 잊지 못하는 야구팬들 사직으로 - 2022. 9. 14
'무쇠 팔' 최동원 선수 11주기 추모행사가 14일 오후 부산사직야구장 최동원 동상 앞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최동원 보러 오이소'라는 제목에 '눈물 나게 그리운 그의 이름 무쇠 팔 최동원 11주기'라는 부제목으로 진행됐다.
고인을 추억하는 야구팬들과 최동원 야구교실 어린이 회원, 최동원기념사업회 관계자, 롯데자이언츠 관계자, 최동원 어머니 김정자 여사, 장동철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무총장, 조은성 다큐멘터리 '1984 최동원' 감독 등이 참석했답니다.
최동원 야구 교실 선수 대표와 학부모 대표가 손편지를 낭독하는 시간도 가졌다.
부대 행사로 롯데 자이언츠 첫 한국 시리즈 우승 기록과 최동원 선수 활약을 담은 '1984 최동원' 야외 상영회도 진행된다.
롯데자이언츠 한국 시리즈 우승 멤버였던 레전드 김용철이 참석해 함께 추모하는 자리도 마련된답니다.
이날 프로야구 SSG와 롯데의 경기 시작 전에는 전광판에 추모 영상을 상영한 뒤 선수단과 관중이 묵념하고, 최동원 야구 교실 어린이 선수단이 애국가를 제창한답니다.
경기 시구는 최동원의 어머니인 김정자 여사가 맡는다.
롯데자이언츠 선수단도 최동원의 현역 시절 등번호이자 롯데 구단의 영구 결번인 '11번'과 최동원을 의미하는 'LEGEND'가 적힌 추모 패치를 부착하고 경기에 출전한답니다.
'무쇠 팔'로 당대를 풍미한 최동원은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투수로 평가받는다.
1984년 한국시리즈 일곱 경기 중 5번 등판해 4승을 거둔 건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150㎞를 넘나드는 강속구와 특유의 '폭포수 커브'로 상대 타자를 압도하는 모습은 지금도 야구팬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답니다.
은퇴 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등을 지낸 최동원은 대장암으로 투병하다가 2011년 9월 1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