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갑부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답니다. 위로는 언니 육인순과 오빠 육인수, 아래로 여동생 육예수가 있답니다. 박정희에게는 각각 처형, 손위처남, 처제랍니다.
육종관은 본처 이경령 외에도 3명의 첩들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경기도 개성시 출신의 친자매도 있어서 각각 '큰 개성댁', '작은 개성댁'으로 구분해야 했답니다. 이렇게 복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육종관은 적자와 서자를 모두 합해 총 12남 10녀를 두었답니다. 당연히 본처 이경령은 육종관의 축첩을 싫어했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는 여성이 여전히 왕조시대와 식민시대를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던 가부장제 사회에서 경제권을 독점한 가장을 거역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리고 이경령의 울분은 딸 육영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답니다.
육영수는 옥천공립보통학교(現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경성부 배화고등여학교로 진학했답니다. 배화고녀는 1898년 미국인 선교사 조세핀 캠벨 여사가 설립한 개신교(감리회) 미션스쿨로, 전통 깊은 명문 여학교였답니다.
그런데 배화고등여학교 재학 당시 육영수의 거처는, 다름 아닌 '큰 개성댁'의 집이었답니다. 물론 집 주인은 아버지 육종관이었지만, 실세는 서울에 왔을 때나 가끔 머무는 육종관이 아니라 큰 개성댁이었고, 상경과 동시에 육영수는 신데렐라 처지에 놓이게 된답니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서모(庶母)와 적녀(嫡女)의 사이는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고, 실제로 큰 개성댁은 친어머니 이경령이 서울에서 기숙 중인 육영수에게 보낸 물자를 중간에 가로채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육영수는 배화고녀 재학 4년간 부모에게 불만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답니다.
육영수가 재학하던 당시 배화고등여학교에서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육영수는 무척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고 한답니다. 또한 육영수는 배화고녀 졸업 후 대학에도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딸들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고 아들들만 대학에 보내겠다고 했다. 육종관은 매우 부자였으므로, 그가 딸의 수학여행과 대학 진학에 반대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워낙 보수적이고 남존여비가 심하던 시절이라, 여자가 집을 떠나 멀리 여행하거나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을 몹시 부정적으로 보던 당대 분위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나마 고등여학교까지 졸업한 것만 해도 당시로서는, 특히 여성으로서는 상당한 고학력이었답니다.
배화고등여학교 졸업 후 육영수는 고향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내려와, 옥천여자전수학교(現 옥천여자중학교)에서 1년 3개월간 교사 생활을 했답니다.